작가의 독특한 배경은 일단 접어두자. 한국에서 자라 외국에서 영어로 소설을 쓰는 일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배경이 소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물론, 이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독서하기도 힘들다.
어떤 의미에서 통속적인 내용을 다루면서도 색다른 구도를 잘 활용한 데에는 작가의 탄탄한 문장력이 큰 역할을 했다. 보지는 못했지만 영어 원문도 꽤 수려할 듯 싶다. 한국어 번역도 나쁘지 않았다. 작가의 모국어였기에 번역자가 어려웠을 법하다.
소설의 배경과 설정은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다. “친절한 금자씨”를 비롯해 비전향 장기수의 느낌과 기개가 느껴지고, 위안부를 다룬 부분에서는 “여명의 눈동자”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후 현대의 북한을 다루는 장면은 ‘고난의 행군’ 이후 주민 이탈과 비참함을 머리 속에 그리게 된다. 역사적 배경을 다룬 이야기에서는 미시사와 역사가 잘 어우러져야 설득력이 있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이야기의 시간적 범위는 대하 소설급이지만, 이 소설은 대하 소설도, 역사 소설도 아니다. 이 소설은 로맨스 소설이자 가족 소설이다. 여덟 가지 인생이라는 것은 봉건 가족에 의해 파괴된 공동체가 대안 가족을 통해 복원되는 이야기다. 그 복원의 끝에 삶이 아름답게 마무리된다.
약점도 있다. 첩보물이라면 있어야 할 긴장감이 부족하고, 첩보 활동의 세부 묘사도 다소 아쉽다. 이 소설의 핵심은 한국이라는 특수한 맥락 속 인간과 가족이다. 첩보는 그 맥락을 살리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다 떠나서 여덟 가지 인생을 살게 되는 캐릭터가 매력적이다. 이름 없는 여자는 묵미란이었다가, 용말이었다가, 딸 미희가 되기도 한다. 그녀는 “노예, 탈출 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그리고 어머니”다. 저 폭력의 시대를 살았던 여자들에게 이름이란 무엇이었을까? “이름 없음”이 그 고단함과 슬픔을 담아내는 온전한 표현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