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르 카레,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이념 극장의 연기와 반연기
fiction
spy
Author

JS HUHH

Published

August 7, 2025

The Book

TL; DR

  • 스파이 소설이란 이런 것이구나.
  • 인간사의 복잡도를 집약한 것은 바로 이중 간첩이다.

냉전, 스파이 그리고 이중 간첩

르 카레의 소설을 읽었다. 해설에 보면 르 카레는 진정성보다 개연성을 중시했다고 한다. 이 말의 의미를 알겠다.

판타지를 점점 더 리얼리티 쪽으로 가져오면 사람들은 점점 더 그 판타지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이야기꾼에게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진정성(사실과의 부합)은 아주 따분한 것인 반면 신빙성(사실인 것 같음)이야말로 소설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냉전 시대는 최후의 적을 상정할 수 있었던 시대다. 이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다면 고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첩보는 대적 활동의 핵심이었다. 스파이는 정보를 얻는 수단이다. 이중 간첩은 상대의 정보 전체를 흔들 수 있는 지렛대다. 때로는 와해시킬 수도 있다. 르 카레의 말을 빌리면 스파이는 진정성에 부합할 수 있다. 하지만 신빙성은 부족할 수 있다. 반면 이중 간첩은 개연성을 잘 갖추고 있다.

이중 간첩은 어떤 존재인가?

간첩이나 슬리퍼셀로 활동하다가 임무를 잊는 이야기를 보곤 한다.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다. 이념과 신념으로 무장했다고 해도 습관에 젖으면 목표는 흐려진다. 그래서 이중간첩은 모순적인 존재다. 어느 쪽으로 자신의 닻을 내릴 것인가? 이중 간첩을 부리는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이 간첩이 나를 위해서 일하고 있을까?

역스파이 활동을 하는 사람은 화가와 비슷해서, 망치를 들고 뒤에 서 있다가 일이 끝나면 망치로 때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자기가 무엇을 성취하려고 애쓰고 있는지를 잊어버린다.

이중 간첩도 상위에서 보면 하나의 수단이다. 이중 간첩의 의도나 활동이 궤를 벗어나는 순간 망치를 맞는다. 이는 숙명과 같다.

이념 극장에서 벌이는 공작과 역공작

스파이 물의 백미는 공작과 역공작이다. 때로는 역공작의 역공작도 있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그 묘미를 잘 담고 있다. 이런 장르를 떠올리면 007 시리즈나 본 시리즈가 생각난다. 권총과 액션이 있지만 더 재미있는 것은 말의 싸움이다.

소설의 백미는 “사문회”(청문회와 재판이 결합된 사회주의 사회의 심판)에서 벌이는 논전이다. 모든 플레이어가 이념 극장에서 벌이는 논전이다. 법정 재판과 비슷하다. 하지만 재판보다는 증거와 논리로 벌이는 이념 극장에 가깝다. 스포일러가 될 것이므로 전개 과정은 담지 않는다. 직접 읽으면 내 말을 수긍하게 될 것이다.

이념에 의해 붕괴된 인간

결말 또한 그렇다. 이 치열한 전쟁은 왜 무엇 때문에 벌이는 것일까?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높은 데 있는 사람들은 그 아래의 인간들은 장기판의 말로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말들도 인간이고, 지켜야 하는 자신의 존엄을 갖추고 있다. 이 소설의 결말이 일종의 비극일 수 있지만, 통상적인 비극이 아니라 뭔가를 지켜기 위한 저항 혹은 투쟁에 가깝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베를린 장벽에 관해 르 카레는 짧고 굵게 이렇게 회고한다. “베를린 장벽은 완전한 극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쳐 버린 이데올로기의 기괴함을 완벽하게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