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소송의 나라?
조선에는 송사가 난무했다! 이 책 담은 놀라운 사실이다. 봉건 신분제 사회에서 무슨 소송? 양반이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노비나 상놈을 때려 죽일 수 있었던 시대 아니었다. 아니다. 사극을 봐서 익히 알 수 있듯이 조선은 왕권조차 전능하지 못한 절차의 국가였다. 물론 근대적인 삼권 분립과는 거리가 멀지만, 사법과 행정을 통합한 고을 사또, 절도사 혹은 상급 기관의 장에 의해서 송사가 제기되고 심의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 사회에서 쟁송의 권리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았다. 책이 서술하듯이 노비는 재산의 일부로 분쟁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노비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경우 이에 항의하고 바로잡는 일이 아예 불가능한 사회도 아니었다. 최후의 수단(last resort)로 노비까지 기댈 수 있는 일종의 법적인 절차와 수단이 있었다는 대목이 놀라웠다.
과연 우리는 조선에 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가?
말로 싸우는 방식, 어떤 이들은 근대 민주주의 근간인 의회 정치라는 게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내란’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라고 평한다. 서로 목숨을 내놓고 끝장을 보는 대신 말로 싸우고 승복하며 기회가 되면 또 말로 싸워서 이겨보라는 취지라는 것이다. 송사건 정치건 말로 싸우려면 필요한 것이 글자이다. 송사의 모든 요소가 말과 글에 의존한다.
책이 보여주듯이 조선의 쟁송이란 “원님 재판”하듯 제멋대로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피고와 원고 양쪽에서 치열하게 증거를 제출했고 이는 대부분 문서의 형태였다. 조선 사회에서 이렇게 송사가 가능하고 번성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세종 대왕의 한글 창제가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세종 스스로 밝힌 한글 창제의 이유에서 보듯이 한글은 신분과 관계없이 백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 낼 수 있는 큰 그릇으로 작동했다.
관료들의 고단함 그리고 전문직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조선의 송사는 민사와 형사가 뒤섞인 형태이다. 이렇듯 온갖 송사를 처리해야 했다면 중앙 뿐 아니라 지방 관료의 삶 역시 무척 피곤했을 듯 싶다. 제출된 소장을 다 검토하고, 재판에 올려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류하고, 양쪽의 변론을 청취한 뒤 합당한 판결을 내려야 했다. 관청이 수행했던 치안 기능까지 고려해보면 DC 코믹스에 등장하는 “저지 드레드”에 가까운 존재가 지방의 사또가 아니었을까? 이렇듯 막강한 관력을 쥐고 있으니 ’탐관오리’로 변질되기도 쉬웠으리라. 하지만 어느 정도의 기능을 유지하려면 아마 지방 관료의 몸과 마음을 갈아 넣어야 했을 것이다.
이쯤되면 조선 시대에 ’변호사’가 없었을까 싶은데 실제로 있더라! 소장을 대신 써주고 백성들에게 생소한 법률 자문을 해주는 “외지부”가 그것이다. 요즘 같이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은 아니었다고 한다. 외지부는 행정 절차를 방해하는 것으로 여겨져서 벌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기능과 돈벌이는 요즘 변호사 못지 않았던 것 같다. 배심원 제도가 생기면서 배심원에게 호소하는 목적의 소송 변호사가 따로 생겨났듯이, 저 시대의 가장 중요한 외지부의 자질은 자신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는 필력 그리고 격쟁 시 울려 퍼지는 비통한 울음소리 같은 극적 연출이었다.
큰 그림이 함께 있었다면
저자가 책에 적었듯이 조선에서 벌어진 쟁송 혹은 유사한 형식을 갖춘 분쟁의 역사는 꽤 풍부하다. 여기서 나는 좀 더 큰 그림을 차분히 봤으면 싶었다. 물론 이러한 조망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재미있는 사례를 발굴하기 위해서 예외적인 경우 위주로 소개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조선 시대의 법적 풍경에 관한 조금 더 큰 그림을 통계와 숫자로 알려주는 짧은 대목이 하나 들어가 있다면 더 좋았겠다 싶었다.
인용
조선 시대 역시 일상생황에서 분쟁이 생겼을 때 도저히 해결이 안 된다면 법에 호소할 수 밖에 었었다. 이떄 소송을 거는, 원고 쪽을 원이라고 했고, 피소를 당한 쪽을 척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척진다”는 말은 조선시대로 치면 “너를 고소하겠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원수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항소의 방법 중에서는 북을 치고 꽹과리를 치며 높으신 분(임금)에게 하소연하는 격쟁도 있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한풀이의 장이었는데, 이 떄문에 왕의 행차가 사극에서 보는 것처럼 웅장하고 엄숙한 행렬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어온 억울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징을 치며 소리를 지르는 시장판이었다.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여성이 결혼하면서 가져간 재산은 시댁 재산에 합쳐지지 않았고, 여성이 재산의 주인으로써 맘대로 팔거나 남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윤선도는 조선 시대 여러 분쟁에 빠지지 않는 치열한 싸움꾼이었다.
이러다보니 왠많나 부자집도 과거에 10년 가까이 도전하다 보면 가진 재산을 다 까먹기 일쑤였기에 자식이 많은 집에서는 장남에게 모든 여력을 올인하곤 했다.
한 장군이 뜰에 붉은 깃발을 세워 두고 휘하의 무관들을 모아 놓은 뒤 “아내를 두려워하는 자는 붉은 기 아래로 가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푸른기 아래로 가라”로 명했다. 그러자 모든 무관이 붉은 기 아래로 갔는데 단 한사람만이 푸른 기 아래로 갔다. 그 사람을 불러 어째서 푸른기 아래로 갔는지 이유를 물으니, “부인이 남자들이 모이면 여색 이야기나 하나 함께 끼어 있지 말라”라고 당부를 했다고 한다.